다녀온 길

지리산 둘레길 20구간(산동~주천)

나무 향기 2020. 6. 20.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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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마지막 구간이다.

남은 거리는 15.9km. 몇 해 전 처음 시작했던 그 곳.

산동면 사무소 앞 둘레길 안내판 앞에서 잠시 숨을 쉰다.

지난 달 걸었던 가탄 마을에서 종점인 주천면까지의 안내도. 참....많이도 걸었다. 목아재에서 당재까지의 지선 구간이 유독 눈에 밟힌다.

 

산동-주천

산동 - 주천 15.9km 약 7시간 산동 - 주천 : 중 주천 - 산동 : 상 구간별 경유지 산동면사무소 - 현천마을(1.9km) - 계척마을(1.8km) - 밤재(5.2km) - 지리산유스호스텔(2.7km) - 주천안내소(4.3km) 전라남도 구례

jirisantrail.kr

오래 지체할 여지가 없다.

마을을 지나 남은 길을 향해 다시 방향을 잡는다.

초등학교 교정의 단풍이 유독 선명하고 깨끗하다. 저 교정에서 지낸 수많은 어린 시간들은 어디에 있을까?
산동면의 일부 들판에는 추수가 끝난 논도 있다. 하늘이 유난히 푸르다.

산동에서 도로를 따라 약400m를 걸으면 좌측으로 낮은 경사를 통해

현천마을을 지나게 된다.

마지막 산동에서 주천까지는 줄곧 낮은 경사길이기에 큰 어려움은 없지만

오늘 종일 오락가락하던 비구름이 끝까지 애를 먹인다.

현천마을에서 내려다 본 정경. 멀리 지리산 주능선에서 두꺼운 비구름이 또 몰려오고 있다. 아....어쩔...ㅠㅠ

비 구름의 방향은 도통 알 수가 없기에 그 다음은

비 구름 보다 빨리 걷는 게 상책!

마지막 종점인 주천면까지는 이제 13.9km. 속도를 높여 계척마을로 향한다.

계척마을은 우리나라 산수유 나무의 시목지로 알려져 있다.
계척마을은 산수유 시배지 답게 마을 곳곳에 산수유 나무가 터널을 이루듯 서있다.

엄청난 산수유 나무의 터널을 지나 마침내 도착한 곳.

우리나라 최초의 산수유 나무. 수령이 1천년인 산수유 나무.

보기만 해도 그 모습에서 느껴지는 세월의 무게란...

우리나라 산수유 나무의 할머니 격인 1천년 묵은 산수유 나무.
마을의 산수유 열매에 묻힌 둘레길벗 표지판.

산수유 나무 시목지 바로 아래에 조성되어 있는 이충무공 관련

기념관.

요즘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역사란 어떤 의미로 각인되어 있을까?

갈수록 역사에 대한 세대간 연결고리가 약해지고, 교육현장에서 조차

역사는 그냥 머리 아픈 교과 과목으로만 인식되는 건 아닐까 하는

우려 아닌 우려를 하게 되는 건 지나친 걸까?

이충무공 백의종군길은 이곳에서도 이어진다.

계척 마을의 붉게 열린 산수유를 뒤로 하고 밤재를 향해 간다.

밤재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잘 조성된 편백숲이 기다리고 있다.

구례군에서 수령 30년 이상된 편백으로 조성한 숲인데 중간중간

벤치와 화장실도 있어 산책로로서 나름 운치가 있다.

계척마을을 지나 숲으로 들면 편백숲이 이어진다. 편백 특유의 상쾌함. 힐링 숲이다.

낙엽 덮인 편백 숲에 홀로 앉아 있는 낮은 의자.

지친 발길 쉬어 가라고 조용히 자리를 내어준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저리 기다렸을까?

얼마나 많은 길손들의 지친 발을 보듬었을까?

잠시 머물러 숨을 쉬어 본다.

편백숲 산책로 곳곳에 설치된 벤치. 잠시 쉬어 가기에 더없이 좋은 공간이다. 

숲속은 이미 가을로 가득 물들어 있다.

노란, 빨간, 그런가 하면 또 푸르고...

그 각각의 색색으로 물든 가을이 숲속을 가득 채우고 있다.

실개천 마저 노랗게 물들일 것 같은 은행잎.
검은 돌계단 위에 융단인듯 은행잎이 펼쳐져 있었다. 조심스럽게 느껴본다.

오색 가을의 향연을 지나 능선을 올라서니 밤재다.

밤나무가 유독 많아서인가?

해발 490m. 고개 위의 바람이 엄청나게 시원하다.

언제나 다정한 길벗. 둘레길 표지목. 밤재 정상에서 더 이쁘다. ㅎ
편백숲을 지나 와서였을까? 기분이 상쾌하다. 인증샷.ㅎ

미리 준비해온 도시락으로 밤새 정상의 정자에서 기분 좋게

점심 식사를 즐긴다. 유람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 즈음 또 다시 나타난 비구름. 정말 지겹도록 따라다닌다. ㅠㅠ

남은 식사를 급하게 비우고 다시 배낭을 메고 길을 내려간다.

비를 안맞기 위해선 비구름 보다 빨라야 한다..ㅜㅜ

 

밤재를 내려가는 길목에 글씨가 선명한 비석이 서있다.

절대 잊어서는 안되는 길이다.

그 오래 전 잔악무도한 섬나라 도적들이 여기 밤재를 중심으로 동서로 이 땅을 유린하였다.

부족하지 않게 시원한 가을바람을 반찬 삼아 배를 채우고

내려가는 길.  이제 종착점인 주천면까지 남은 거리는 6.9km.

비 맞고 바람 맞으며 가을 속으로 17km를 걸어왔다.

 

기분 좋은 하산길.

넓게 펼쳐진 가을 들판 위로 물감처럼 푸른 하늘이

활짝 웃으며 반기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마을이 원천마을. 종일 따라다니던 비 구름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원천 초등학교.  주천면이다.

초등학교 담장 옆에 서있는 저 둘레길벗이 마지막이리라....

멀고도 긴 둘레길 여정을 길을 잃지 않고 무사히 마치도록 언제나 함께해 주었던 길벗. 이제 긴 이별을 고한다.
남원시 관할 지리산 둘레길 전 구간에 대한 안내도. 시작점이자 종착점인 주천면의 상징과도 같은 안내판. 그리고 안내 센터

마지막 지점이다. 아니 시작 지점이다.

둘레길은 시작점은 있지만 종착점은 따로 있지 않다.

기나긴 여정을 뒤돌아 보면, 마지막을 향해서 가기 보단

또다른 시작을 위해서 걸어온 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나의 끝은 또 하나의 시작인 것을. 그렇기에 누구나 각자의

앞에 놓인 모든 길에 있어서 결코 끝을 향해서가 아닌 새로운

시작을 위한 발걸음이 되길 바란다.

 

사실, 처음부터 둘레길을 완주하거나 할,

그런 거창한 계획 같은 건 아니었다.

단지, 산을 좋아하고 자연을 가까이하다 보니

호기심에 첫 발을 내딛었던 것이고, 뜻하지 않게

그 길에서 좋은 인연들을 만나게 되어 이후론

일종의 마음의 안식처로 그저 마음 힘들 때,

혹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 걸었던 길이었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선가 길을 걸으면 걸을수록

그 정감에 빠져들게 되었고 친인들과 걷고,

새로운 사람을 마주하게 되고, 그런 인연들 속에서

일상에서는 가지지 못했던 위안도 얻으며

나도 모르게 꼭 완성하고 싶다는 욕심 아닌 욕심이

생겼던 것 같다.

 

끝점은 없고 시작점만 있는 둘레길,

어떤 길이든 끝나는 곳에선 항상 또다른 시작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든 모르든 넌지시 알러주며 떠나는 나를 보낸다.

길 위에서 만났던 모든 이들에게 감사한다.

고마웠다. 시간들.

 

※ 2013년부터 시작되었던 지리산 둘레길 답사를 우여곡절 끝에

   2018에야 마무리를 지었고, 그 후기를 정리하는 작업을

   2019년부터 거의 1년의 시간을 거쳐 2020년 6월에야 마무리 하였다.

   몇 년이 지난 과거의 기억을 사진 몇장으로 소환하고 그 때의 소감을

   옮겨 적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지리산 둘레 3개도

   (전북, 전남, 경남), 5개시군(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 21개읍면

   120여개 마을을 잇는 295km의 긴 여정의 발자취를 한 꼭지 한 꼭지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그 만큼 둘레길 한 걸음 마다 담겨있던 나만의

   생각과 느낌이 여느 때의 그것과는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 때 당시의 기억과 기록이, 후기를 적는 지금과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을 수도 있지만 이 후기는 사실 관계가 아닌 그 때 당시의 나의 느낌과

   생각과 상황을 남기고자 하는 의도이므로 그 점에 있어서는 크게 개의치

   아니한다.

   지리산 둘레길 전 구간에 대한 답사 후기를 이에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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