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마지막 구간이다.
남은 거리는 15.9km. 몇 해 전 처음 시작했던 그 곳.
산동면 사무소 앞 둘레길 안내판 앞에서 잠시 숨을 쉰다.
오래 지체할 여지가 없다.
마을을 지나 남은 길을 향해 다시 방향을 잡는다.
산동에서 도로를 따라 약400m를 걸으면 좌측으로 낮은 경사를 통해
현천마을을 지나게 된다.
마지막 산동에서 주천까지는 줄곧 낮은 경사길이기에 큰 어려움은 없지만
오늘 종일 오락가락하던 비구름이 끝까지 애를 먹인다.
비 구름의 방향은 도통 알 수가 없기에 그 다음은
비 구름 보다 빨리 걷는 게 상책!
마지막 종점인 주천면까지는 이제 13.9km. 속도를 높여 계척마을로 향한다.
엄청난 산수유 나무의 터널을 지나 마침내 도착한 곳.
우리나라 최초의 산수유 나무. 수령이 1천년인 산수유 나무.
보기만 해도 그 모습에서 느껴지는 세월의 무게란...
산수유 나무 시목지 바로 아래에 조성되어 있는 이충무공 관련
기념관.
요즘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역사란 어떤 의미로 각인되어 있을까?
갈수록 역사에 대한 세대간 연결고리가 약해지고, 교육현장에서 조차
역사는 그냥 머리 아픈 교과 과목으로만 인식되는 건 아닐까 하는
우려 아닌 우려를 하게 되는 건 지나친 걸까?
계척 마을의 붉게 열린 산수유를 뒤로 하고 밤재를 향해 간다.
밤재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잘 조성된 편백숲이 기다리고 있다.
구례군에서 수령 30년 이상된 편백으로 조성한 숲인데 중간중간
벤치와 화장실도 있어 산책로로서 나름 운치가 있다.
낙엽 덮인 편백 숲에 홀로 앉아 있는 낮은 의자.
지친 발길 쉬어 가라고 조용히 자리를 내어준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저리 기다렸을까?
얼마나 많은 길손들의 지친 발을 보듬었을까?
잠시 머물러 숨을 쉬어 본다.
숲속은 이미 가을로 가득 물들어 있다.
노란, 빨간, 그런가 하면 또 푸르고...
그 각각의 색색으로 물든 가을이 숲속을 가득 채우고 있다.
오색 가을의 향연을 지나 능선을 올라서니 밤재다.
밤나무가 유독 많아서인가?
해발 490m. 고개 위의 바람이 엄청나게 시원하다.
미리 준비해온 도시락으로 밤새 정상의 정자에서 기분 좋게
점심 식사를 즐긴다. 유람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 즈음 또 다시 나타난 비구름. 정말 지겹도록 따라다닌다. ㅠㅠ
남은 식사를 급하게 비우고 다시 배낭을 메고 길을 내려간다.
비를 안맞기 위해선 비구름 보다 빨라야 한다..ㅜㅜ
밤재를 내려가는 길목에 글씨가 선명한 비석이 서있다.
절대 잊어서는 안되는 길이다.
부족하지 않게 시원한 가을바람을 반찬 삼아 배를 채우고
내려가는 길. 이제 종착점인 주천면까지 남은 거리는 6.9km.
비 맞고 바람 맞으며 가을 속으로 17km를 걸어왔다.
기분 좋은 하산길.
넓게 펼쳐진 가을 들판 위로 물감처럼 푸른 하늘이
활짝 웃으며 반기고 있었다.
원천 초등학교. 주천면이다.
초등학교 담장 옆에 서있는 저 둘레길벗이 마지막이리라....
마지막 지점이다. 아니 시작 지점이다.
둘레길은 시작점은 있지만 종착점은 따로 있지 않다.
기나긴 여정을 뒤돌아 보면, 마지막을 향해서 가기 보단
또다른 시작을 위해서 걸어온 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나의 끝은 또 하나의 시작인 것을. 그렇기에 누구나 각자의
앞에 놓인 모든 길에 있어서 결코 끝을 향해서가 아닌 새로운
시작을 위한 발걸음이 되길 바란다.
사실, 처음부터 둘레길을 완주하거나 할,
그런 거창한 계획 같은 건 아니었다.
단지, 산을 좋아하고 자연을 가까이하다 보니
호기심에 첫 발을 내딛었던 것이고, 뜻하지 않게
그 길에서 좋은 인연들을 만나게 되어 이후론
일종의 마음의 안식처로 그저 마음 힘들 때,
혹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 걸었던 길이었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선가 길을 걸으면 걸을수록
그 정감에 빠져들게 되었고 친인들과 걷고,
새로운 사람을 마주하게 되고, 그런 인연들 속에서
일상에서는 가지지 못했던 위안도 얻으며
나도 모르게 꼭 완성하고 싶다는 욕심 아닌 욕심이
생겼던 것 같다.
끝점은 없고 시작점만 있는 둘레길,
어떤 길이든 끝나는 곳에선 항상 또다른 시작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든 모르든 넌지시 알러주며 떠나는 나를 보낸다.
길 위에서 만났던 모든 이들에게 감사한다.
고마웠다. 시간들.
※ 2013년부터 시작되었던 지리산 둘레길 답사를 우여곡절 끝에
2018에야 마무리를 지었고, 그 후기를 정리하는 작업을
2019년부터 거의 1년의 시간을 거쳐 2020년 6월에야 마무리 하였다.
몇 년이 지난 과거의 기억을 사진 몇장으로 소환하고 그 때의 소감을
옮겨 적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지리산 둘레 3개도
(전북, 전남, 경남), 5개시군(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 21개읍면
120여개 마을을 잇는 295km의 긴 여정의 발자취를 한 꼭지 한 꼭지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그 만큼 둘레길 한 걸음 마다 담겨있던 나만의
생각과 느낌이 여느 때의 그것과는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 때 당시의 기억과 기록이, 후기를 적는 지금과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을 수도 있지만 이 후기는 사실 관계가 아닌 그 때 당시의 나의 느낌과
생각과 상황을 남기고자 하는 의도이므로 그 점에 있어서는 크게 개의치
아니한다.
지리산 둘레길 전 구간에 대한 답사 후기를 이에 마친다.
'다녀온 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울릉도 3박4일 가족 여행기-2/2 (0) | 2020.07.11 |
---|---|
울릉도 3박4일 가족 여행기-1/2 (0) | 2020.07.10 |
지리산 둘레길 19구간(난동~산동) (0) | 2020.06.20 |
지리산 둘레길 15~16구간(오미~송정~가탄) (0) | 2020.06.13 |
금오도 비렁길, 전설 속을 걷다.(3~5코스) (4) | 2020.05.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