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전설 속으로 들어온 듯, 신비로운 감흥에 싸여 보낸 금오도에서의 첫 하루였다.
아침 일찍 시계를 맞춰 놓았으나, 문 밖을 보니 짙은 안개가
깔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기에 잠시 출발을 늦추어 7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민박집을 나선다.
민박집에 미리 얘기해 두면 원하는 시각에 아침 식사를
할 수 있지만, 집에서 준비해 온 즉석 밥으로 간단히
떼우고 가벼운 몸으로 새로운 길을 시작한다.
오늘 처음 걷게될 3코스는 비렁길의 하이라이트로
알려져 있고, 많은 사람들이 짧은 일정으로 비렁길을
체험하기 위해 3코스만 걷고 가기도 한다.
3코스 진입로는 어제 저녁 식사 후 마을 산책겸 돌면서
미리 보아 두었던 터라 곧바로 올라갈 수 있었다.
진입로 앞에는 함구미로 가는 배를 타는 선착장이
있고 화장실도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어서 비박 장소로도
많이들 찾는다.
3코스는 초입이 가파른 동백 나무 숲으로 이우어져 있고,
그 숲을 지나면 바로 해안가 절벽의 환상적인 경치가
길게 펼쳐지기에 가히 비렁길의 대표 코스라고 할만하다.
비렁길은 전체적으로 길이 좁고 숲,나무가 우거진 탓에, 비렁길 조성 이전에 사람들의 발길에 의해 만들어진
오솔길과 혼동할 수 있는 구간이 여러 곳 있다.
한 번 길을 잘못 들면 위험할뿐 아니라 다시 되돌아와야
하기에 체력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많은 손실이 있기 마련.
갈림길에선 극히 주의해야 한다.
왠만큼 큰 갈림길에서는 비렁길 안내 푯말이 있지만
그렇지 못한 부분도 많으니 세심하게 살필 일이다.
운무에 젖은 모습에 감탄하며 어느새 갈바람통 전망대에 이른다.
전망대에 걸린 시 한 수에 경치를 감상하자니 왠지 애잔한 마음이 든다.
※갈바람 : 가을 바람의 준말, 또는 뱃사람들이 말하는 서풍을 이르기도 한다.
갈바람통 전망대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우측으로 돌아보니, 어제 종일 걸었던 섬자락의 모습이 자욱한 운무에 가려져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비렁길은...정말이지 앞으로 걸어 나가기가 힘든 길임을
다시 한 번 느낀다.
자꾸만 옆을 보게 되고 뒤를 돌아다 보게 한다.
대부분의 구간이 섬의 해안단구를 따라 걷는 3코스의 경우,
숲길도 숲길이거니와 아래로 펼쳐지는 절벽,해안에서
펼쳐지는 바다의 힘찬 파도도 놓칠 수 없는 절경이다.
다만, 그 절경에 취해 자칫 발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안전하게 감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갈바람통 전망대에서 1km 남짓 걸어가면 비렁길 5개 코스
통틀어 최고의 전망으로 알려진 매봉 전망대가 나온다.
아쉽게도 그 날은 짙은 운무로 인해 끝없이 펼쳐진 창해의 시원한 모습은 만나지 못했지만 나름 보일듯 말듯
아스라히 펼쳐진 비경도 충분히 아름답다고 할 수 있다.
3코스의 유명한 포인트로 비렁다리가 있다.
해안가 절벽 사이로 놓인 철제 다리로, 출렁거리는
아찔함은 없지만 다리위에서 바라다 보는 경치와
파도가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다.
걷는 길 우측으로 펼쳐진 해안 절벽의 비경을 감상하면 조심조심 발걸음을 계속 이어간다.
촉촉히 젖은 동백길을 걷다 보면 3코스의 종점이자 4코스의 시작점인 학동 마을을 거친다.
학동마을을 지나 사다리통 전망대가 나오면 4코스의
1/3 정도가 지나온 셈이다.
홀로 놓여 있는 통나무 의자가 인상적이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가 불현듯 떠오른다.
4코스의 마지막 전망대인 온금동 전망대에 다다르니 아침
내내 짙게 끼었던 안개가 제법 많이 걷혀 어느 정도 시야가
트여 온다.
심포 마을로 내려서니 하늘이 파랗게 개었다.
마을은 한산하였고 물 때 마저 썰물이라 철썩임도 없어서
농촌의 마을 같았다.
마을은 깨끗하게 잘 정비되어 있었고 집집마다 봄 꽃으로 장식된 화분이 놓여 있어서 마치 커다란 정원에 들어선
느낌이다.
마을 사람들은 주로 낮에는 생업에 종사하느라 바다에
나가 있는 듯. 오가는 사람들이나 차는 없었고
허기진 배를 채울 식당도 둘러 보았으나 대부분 민박, 펜션과 함께 운영하고 상시로 영업중인 곳은 없기에.
미리 전화로 예약하지 않으면 식사는 불가능 하다.
아무리 둘러봐도 식당은 보이지 않고, 부득이하게 마을 앞
쉼터에서 가져간 라면으로 점심을 해결한다.
비렁길 코스 내내 식당이나 매점은 정말이지 마을마다
하나 혹은 없거나...ㅠㅠ
애초에 준비해 가지 않는다면, 매점이 보이며 무조건 필요한 물품이나 생수는 구입하는 것이 안전하다.
라면 하나에 행복한 기분으로 잠시 그늘 아래 바닷 바람을
즐긴 후 이제 마지막 5코스를 향해 다시 배낭을 멘다.
생수도 비우고 가스도 라면도 비우니...배낭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다. ㅋ
공터 맞은 편으로 보이는 경사진 오르막 길이 5코스로
오르는 길이다.
섬의 모양이 자라를 닮아서 금오도라고 했지만, 5코스 시작점에서 옆으로 고개를 돌리면 마치 공룡 한 마리가
누워 있는듯한 모습의 지형이 눈에 들어온다.
무사 완주를 위해 기운을 넣어주는 듯해서 기분이 좋다.
5코스는 전반적으로 자갈로 이루어진 너덜 구간이 많다.
특히 해안 절벽을 통과하는 구간의 경우 너덜길에서 자칫
균형을 잃게 되면 매우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특히 조심해서 지나야할 구간이다.
종주를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5코스를 걷는 경우라면
다리와 발목이 많이 지친 상태라서 더더욱 그러하다.
5코스에는 2개의 전망대가 있다.
그 중 하나, 막포 전망대이다.
5코스는 너덜지대만 제외하면 급경사나 험한 길이 없어
걷기에 무난하고 우측으로 펼쳐진 바다도
다도해의 섬들과 함께 평화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안개 걷힌 바다에는 안개 속에 숨어있던 작은 섬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보이며 마치 한 가족인듯 정겨운
모습을 보여 준다.
숲길에 있어서느 앞서 걸었던 3코스에 비해 다소 약하지만 그 모자람을 바다의 작은 섬들이 메워준다.
사진 설명을 입력하세요.
5코스의 종점에 다가갈수록 왠지 아쉬움과 허전함이 밀려오는 것은 당연한 일인가?
한 걸음 한 걸음이 아깝고 안타깝게 느껴진다.
한 편으론 어서 빨리 예약된 캠프장으로 달려가 텐트 속에서 망중한을 누리고 싶은 마음이지만
한 편으론 이틀간 걸어 온 비렁길의 첫 만남에서 부터 지금까지의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의 순간들이
화살처럼 지나며 조금만 더 천천히...걷고픈 마음이 굴뚝같다.
어쨌거나 가야할 길은 가야하는 것..
이런저런 상념에 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길 아래로 놓여진 계단길이 나타난다.
직감적으로 이것이 마지막 계단인가? 이제 다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장지마을 대합실로 들어왔다.
이 곳에서는 예약한 캠핑장까지 택시를 타야한다.
섬에서의 마을 버스는 시간 간격도 길뿐더러 정차하는 곳이 매우 제한적이다.
설레임과 걱정을 동시에 안고서 홀로 나섰던 금오도 비렁길 다섯 코스 종주길이었다.
사실 40kg이 넘는 캠핑용 배낭을 꾸리고서 숲길과 해안
절벽을 넘나드는 20km의 트레킹을 나선다는 건
그 자체로도 처음이었거니와 절경과 비경이 나올 때마다
카메라까지 손에 잡아야 했기에 쉬운 길은 결코 아니었다.
당연히 걱정이 앞서는 길이었다.
그러나, 길은 좁고 짙은 안개가 가늘게 내린 비에 젖은
숲길과 바윗길에서는 긴장감도 가졌었지만,
비렁길은 그 마저도 어렵지 않게 떨칠 수 있도록 충분한
안식과 휴식과 평화로움을 건네주었고 그 덕에
큰 무리 없이 예정했던 일정을 마칠 수 있었다.
비렁길은, 신비로움이고 환상이며 애절함과 안타까움이
서려있는 전설의 길이기도 하다.
코로나의 영향이겠지만, 그 아름다운 비경을 거의 혼자
독차지 하듯 느끼고 간직할 수 있었음도 한 편 감사한
일일 것이다.
때묻지 않은 자연과 함께 했던 전설과도 같았던
2박3일간의 여정을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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