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녀온 길

지리산 둘레길 15~16구간(오미~송정~가탄)

나무 향기 2020. 6. 13.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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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8월...

그 뜨거운 햇볕 아래 의외로 고전했던 원부춘~가탄 구간의

녹차향 가득한 기억을 담고, 그 때 포기했던 나머지 구간을 걷기위해

길을 나선다.

가탄마을의 길가 슈퍼에서 오미마을까지의 총 21km 거리의 둘레길을

숲과 언덕을 지나 걷게 된다.

이번은 방향을 달리해서 오미에서 가탄마을로 지금까지와는 역방향으로

진행하게 되는데, 1년전 서시천을 따라 난동~오미 구간을 왕복하면서

묵었던 오미마을의 한옥 민박에서 다시 묵고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미리 전화로 예약을 한 후에, 용인에서 차를 몰고 오미 마을의 그 한옥 민박집을

다시 찾았다.

1년전과는 계절이 달라졌기에 앞마당의 꽃들도 바뀌어 있었고 흐르던 냇물도

줄어 예전의 시원함은 없었지만, 마음으로 느끼는 평화로움과 아늑함은 여전하다.

정갈한 한옥 민박집에서 밤을 지내고, 일찍 나서기 위해 잠을 청한다.

 

새벽 이른 출발을 해야만 송정마을을 지나 가탄까지 두 구간을 모두 만날 수 있다.

 

송정-오미

송정 - 오미 10.4km 5~6시간 송정 - 오미 : 상 오미 - 송정 : 중 구간별 경유지 송정 – 송정계곡(1.8km) – 원송계곡(1.4km) – 노인요양원(2.7km) – 오미(4.5km) 송정-오미구간은 구례군 토지면 전경과 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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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가 좀 못되는 시각. 

주인 아주머니의 어머니 밥상 같은 정성 어린 아침상이 차려지고...

정갈하게 짐을 정리하고 동트기 전 길을 나선다.

새벽의 표지판. 이번 여정은 검은색 화살표 방향으로 걸어야 한다.
길 옆에는 알록달록 가을의 귀염둥이 국화 송이들이 살랑살랑 몸을 흔들며 즐거운 인사를 건넨다

새벽의 푸른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때이다.

바람은 서늘하고 공기는 이슬을 머금어 촉촉하게 얼굴을 감싼다.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 첫 숨을 들이키는 것 처럼 너무나 상쾌하고 좋은 기분이다.

도심에서는 결코 느끼지 못할 산자락 벌판에서 맞이하는 새벽이다.

 

금환낙지의 명당이 있다는 하죽마을을 지나 산고개 마루로 올라선다.

하죽마을은 조선 후기 경주 이씨와 경주 최씨가 명당을 찾아 터를 잡으면서 크게 조성된 마을이다.
마을 윗쪽 문수 저수지에서 내려다 본 하죽 마을과 오미리 벌판

산 둘레길을 걷다 보면 참으로 진기한 장면도 만나고, 별 것 아닌듯 별스러운 것도

마주치게 되는데, 시멘트로 포장된 마을길을 걷는데 난데 없이 그 딱딱한 시멘트를

비집고 고개를 내민 작은 나무 줄기를 보았다.

애초에 길 포장할 때 나무 자리를 일부러 비워두고 하지는 않았을 터. 분명 뚫고 올라온 것이 맞는 것 같은데 참으로 대단한 놈이다.

그 씨앗이 어찌 시멘트 포장길 아래서 싹을 틔워 저렇게 떡하니 길 한가운데를 제 집인양 

차지하고 있게 되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고 대단할뿐이다.

약해보이지만 생존에 있어서는 결코 약해지지 않는 것이 생명의 본질임을 새삼 느끼게 한다.

 

아래만 보아서야 어디 진정한 길꾼이겠는가?

아래로 굽어 생명의 신비로움을 보았으니 이제 눈을 들어 하늘을 보자.

농익은듯 파란 가을 하늘엔 때아닌 하얀 파도가 물결치고 있었다.

수많은 서핑 보드가 파도를 타는 장면이 하늘에서 연출된다.

근래에 이렇게 시원하고 멋드러진 하늘을 본 적이 없다. 너무 감사한 선물이다.

하늘엔 때 아닌 하얀 파도가 그림처럼 물결을 일렁이고 있다.

얼마나 걸었을까?

밝아 온 하늘에 고갯마루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바람을 맞는다.

쌓아둔 통나무는 어디에 쓸 것일까? 솔까끔 마을이다.  마을 이름이 앙증맞다.

들판의 곡식과 나무의 과일이 서서히 제 색깔을 갈아입고 계절의 무게감을 더해가고,

곳곳에 바쁜 손길들이 저마다의 할 일을 찾아 사간을 재촉하고 있다.

이런 바쁜 때에 유유자적 길을 걷고 있으니 참으로 한량이 따로 없다.

들판에 곡식은 눌렇게 익어가고, 길옆의 감나무엔 주황색 단감이 곱게 익어간다.

구례, 남원은 기본적으로 이충무공 백의종군길과도 연관성이 깊고

그런만큼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얽힌 유적지도 많이 지나게 된다.

세월이 몇백년을 지나도 제 잘못 모르고 몹쓸 언행을 일삼는 고약한 것들이

아직도 저렇게 살고 있으니 세상은 언제나 똑바로 설까....

우리 조상들이 좋은 터에 자리 잡아 후손들이 복되게 살고 있으나, 단 하나 이웃 족속들이

고약하니 참으로 옥에 티라고 하겠다.

석주관으로 따라가면 정유재란때의 유적지인 칠의사의 묘를 만나게 된다.

무도한 왜적들을 상대했던 칠의사와 수많은 의병 용사들을 추모하며

드디어 송정마을에 다다랐다.

두 팔 곧게 뻗어 송정마을임을 알려주는 둘레길벗.

송정마을 둘레길벗을 보자마자 바로 길턱에 앉아, 배낭에 넣어 온 간식으로

잠시 체력을 보충한다.

나와 반대 방향으로 걷고 있는 또 다른 둘레꾼이 힘있게 걸어오며 인사를 건넨다.

가탄마을에서 송정으로 넘어간댄다...그리 멀지 않고 힘들지 않은 길이니 천천히

즐기며 걸어 가라고 말을 전해주고 나도 그만 자리를 털고 다시 발을 옮긴다.

산길에서 내려와 송정마을 둘레길벗을 만났던 도로.

이제 가탄 마을로 간다.

 

가탄-송정

가탄 - 송정 10.6km 약 6시간 가탄 - 송정 : 상 송정 - 가탄 : 상 구간별 경유지 가탄 - 법하(0.7km) - 작은재(어안동)(1.2km) - 기촌(1.9km) - 목아재(3.4km) - 송정(3.4km) * 목아재에서 목아재~당재(8.1km)로 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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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에서 내려서서 마을로 진입한다.

내가 들렀던 송정마을은 한참 여기저기 펜션과 숙박시설이 많이 들어서 있었지만

가을녘이라 사람들은 그리 붐비지 않았다.

한여름 휴가철이면 한바탕 떠들썩해질 것이 분명해 보였다.

산골마을의 정취는 많이 사라져 버렸다. 지역 소득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개발과 보존 사이의 가치 판단을 늘 이렇게 결론이 없다.

송정마을에 들어서 있는 펜션들

다시 숲길로 들어서니 유독 밤송이가 많이 떨어져 있다.

일대가 온통 밤나무 천지였고 중간중간에는 밤 수확차 일을 나온 마을 주민의

흔적도 보였다.

송송이 이쁘게 벌어진 밤송기에 마음을 뺏겨 떨어진 밤을 줍느라 제법 시간을 소비했다.
무엇을 위해 세워진 목책일까? 아마도 지나는 길손의 안전한 여행을 기원하는 마음이겠지?

송정마을에서 목아재에 이르는 길은 쉼없이 계속되는 급한 오르막이다.

한 번쯤 쉬어갈만한 곳이 나오면 좋겠지만 깊은 산중에 그런 곳이 있을리는 만무하다.

충분한 식수와 허기를 달랠 먹거리는 반드시 챙겨서 넘어야 한다.

목아재에 다다라서야 마침내 눈앞에 펼쳐진 푸른 가을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한 폭의 그림과 같은 풍경이다.

새벽 출발때부터 멋진 쇼를 보여주었던 하늘의 구름은 여전히 끝날줄 모르고 거친 산등성이 위에서 연신 멋지게 떠 있다.

목아재에 도착.

너무 힘든 탓에 중간중간 사진찍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가탄에서 송정에 이르는 10.6km의 둘레길에는, 둘레길 원 코스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중간에 끊어가는 지선 코스로 목아재에서 당재까지 8km의 코스길이 연결되지만

전체적인 일정상 지선 코스는 그대로 건너뛰고 곧바로 기촌마을로 향한다.

목아재로 내려서면, 지선인 당재로 이어지는 길과 기촌마을로 나아가는 길이 나뉘어지는 갈림길을 만나게 된다. 둘레길벗 표지판을 잘 봐야 한다

기촌마을까지는 전반적으로 내리막이어서 편안한 숲길이 이어진다.

마을로 내려서니 여기도 펜션 공사가 한창이다.

피아골에서 내려오는 섬진강 지류의 하나인 내서천이 흐르고 있고

산새가 좋고 마을이 깨끗해서 아마도 휴양 오는 인구들이 많이 늘고 있는 것 같다.

가을 가뭄에 내서천은 바닥을 보이고, 언덕 위로 신축중인 펜션이 보인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주는 건 도시와 농촌간의 교류 측면에서는 긍정적이나

모쪼록 아름다운 환경만큼은 지켜주었으면 ....

기촌 마을 회관을 거쳐 다시 둘레길을 이어 간다.

마을 벽화. 요즘 왠만한 시골 마을에 마을 벽화가 한두폭 정도는 있는 것 같다.

마을 회관을 지나 임도길이 길게 이어지는데 아마도 뒷산 밤나무 농사를 위해

마을 사람들이 놓은 길인듯 싶다.

길가에는 주먹만한 알밤들이 그냥 뒹굴고, 그 알밤 줍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다.

주먹만한 밤송이들이 벌어진 채로 길에 널려있다. 먼 산 길 이만한 간식거리가 또 없다. 떨어진 놈 중에 성한 놈을 골라 주워 담는다.

밤송이 떨어진 오솔길 지나 숲속을 걷다보면 작은재에 올라서게 된다.

기촌마을부터 작은재를 넘는 길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오르는 길의 경사가 급하게 이어지고 가끔씩 턱밑에 차오는 숨결을 느끼며

힘들여 오르는 길이다.

오르기 전 충분한 식수와 칼로리 보충식을 챙기는 것은 당연히 필수다.

작은재 마루에서 고갯길을 넘는 바람에 잠시 땀을 식히고 법하마을 방향으로 길을 재촉한다.

표지판도 많고 산악회 리본도 여기저기 어지럽게 매여있다. 오가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

법하마을로 내려서면 저 멀리 가탄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앞 화개천만 건너면 가탄 마을이다.

법환마을과 가탄마을은 화개천을 가운데 두고 이웃해 있다. 멀리 보이는 자주색 큰 건물은 가탄마을의 화개명차 공장이다.
화개천 앞 화개초등학교 앞 코스모스가 아이들 얼굴처럼 생글생글 춤을 춘다.

다시 찾아 온 길가 슈퍼...

어느새 마음 속의 둥지가 되어 있었다.

이렇게 길손이 지나는 길목에서 지친 몸을 쉬어가고 마른 목을 축여갈 수 있도록

차려놓은 곳은 예나 지금이나 길가는 객들에게는 더없이 소중하고 고마운 곳이 아닌가.

시원한 맥주 한 병으로 가을 햇살에 마른 갈증을 한 방에 날려 버린다. 감로수가 따로 없다.

목아재와 작은재 ... 이름과는 달리 거칠고 힘든 두 고개를 넘는 8시간 30분의 여정을

길가슈퍼에서 마무리 한다.

황금이 익어가고 밤송이가 벌어지는 풍요로운 가을을 만끽하는 한 편,

개발과 보존에 대한 해묵은 고민도 오랜만에 꺼내어 다시 한 번 화두 삼아 걸었던 길.

어쩌면, 더 많은 개발이 이루어지고 더 많은 사람들이 붐비기 전에 내가 이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에 대해 크게 감사해야할 수도 있겠다.

없어지는 것들과 새롭게 생겨나는 것들의 조화는 영원한 숙제인 것 같다.

 

이제 둘레길 여정을 마무리하기까지 2 구간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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