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녀온 길

가고싶은 섬 굴업도-2

나무 향기 2023. 4. 22.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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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간 데 없이 펼쳐진 서쪽 바다 너머로 사라지는 섬의 태양을 바라보며, 벼랑끝 홀로 선 나뭇가지에 마음을 기대어 하루에게 이별을 고한다.

섬의 하루는 마지막까지 하나가 하나를 보낸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중략)

 

어느 가을 저녁.

시인 윤동주가 노래했던 하늘과 별을 향한 서사의 첫 구절.

 

바다 한 가운데의 외딴 섬의 봄 하늘 아래서, 아름답도록 애절했던 그 한 구절을 되새겨 본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중략...

 

차마 부르지 못했던 그 이름들과 지나간 시간 속의 기억들.

시인 윤동주가 노래했던 그 하늘 과 그 별은 분명 지금의 그것들이 아닐진데, 지금 그 구절들이 생각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시인이 바라 본 먼 곳의 하늘이 억압과 고통 속 아픈 마음을 별을 헤아리는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켰듯,

섬에서 바라 보는 하늘이 각자 떠나온 수많은 외로움들에게 짝을 이루어 또 다른 안식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별들의 대화에 응답이라도 하듯, 땅 위에서는 또 다른 별들이 불을 밝혀 언덕을 수놓는다.

 

바람과 파도와 별...

별이 지도록 그렇게 혼자, 아니, 다른 많은 혼자들과 함께 그렇게 새벽 깊은 시간을 보내고,

 

이런 저런 별들과 대화하며 밤의 향연을 온 몸으로 즐기던 중 길게 사라지는 유성의 흔적이 눈에 들어온다.

별빛 샤워...

 

수없이 많은 별들 만큼이나 수없이 지나온 시간들 속의 이야기들.

별 하나에 이야기 하나...

 

얼마나 지났을까?

식어버린 섬의 밤공기가, 불어오는 바닷 바람에 실려 몸을 감싸니 살짝 오른 취기에 더해 쌀쌀하게 느껴진다.

이제 텐트 속으로 들어가야 할 시간.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가 어딘가 오아시스가 있기 때문이라면,

하늘이 아름다운 이유는 저렇게 많은 별들이 있기 때문이겠지.

 

외딴 섬이 속삭인다.

 

우리 삶이 아름다운 이유는?

 

별에 취하고 술에 취해 잠시 잠을 청한 사이 어느새 아침 여명이 밝아 오고, 고개 내밀어 밖을 보니 아침 바다에는 안개가 자욱하다.

눈을 뜨니 한 폭의 동양화가 앞에 펼쳐진다.

 

수평선 끝에 쌓인 두꺼운 가스층과 새벽 안개 덕에 동쪽의 해돋이는 온전히 볼 수 없지만, 오히려 섬 특유의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내어 외딴 섬만이 가지는 경이로운 아침을 맞는다.

 

언덕 뒷편으로는 이미 떠오른 아침 해가 바다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지난 밤 별빛 속에 흠뻑 젖었던 언덕은 뒤로 떠오르는 아침 햇살에 발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만선을 꿈꾸며 물살을 가르고 이른 바다를 나서는 어선의 바쁜 뱃소리만 새벽 공기를 타고 유난히 크게 들려 온다.

돌아오는 길엔 만선의 콧노래가 함께 하길...

깨끗한 오메가는 아니지만 바다에서 맞는 일출은 언제나 고요하고 장엄한 순간이다.

 

얼마만인가...

파돗 소리 외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아침을 맞이한 것이.

 

하룻밤을 지샜을뿐인데 마치 오래전부터 머물렀던 것 처럼 섬의 일부가 되어버린 느낌.

섬은 바쁘지도 않고 바쁠 수도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 시간이 멈추어 버리는 공간이다.

순수한 자연과 그 자연이 좋아 자연이 되고자 자연을 찾아 온 사람들.

 

그  들 속에서 나도 한 무리가 되어 아침 햇살을 받으며 잠시 명상에 잠긴다.

황금빛 물든 아침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길 수 있는 것도 축복 받은 시간이다.

 

시간은 꿈같이 흘러갔다.

별에 부친 수많은 이야기들도, 누군가의 그리움도, 누군가의 애절함도, 누군가의 행복도 다같이 그렇게 칠흑같은 섬의 밤하늘에 묻어 두고 이제는 다시 내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내가 머물렀던 자리에 또 누군가가 터를 잡았다.

왔다가 머무르고 다시 떠나면그 자리에 또 누군가 머무르고..끊길듯 끊기지 않고 그렇게 이어진다.

 

앞을 보니 벌써 누군가 앞선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먼저 간 사람들이 남긴 흔적은 길이 되어 남는다

 

돌아가는 길 마지막 언덕을 올라 서니 헤어짐이 아쉬웠던지, 섬은 눈을 뗄 수 없는 그림같은 풍경으로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수많은 발자욱 위를 걸어 가는 사람들.

각자가 짊어진 저 배낭들이 단지 하룻밤의 짐만은 아닐 것이다.

 

너무 많은 것을 해야만 하는 곳을 벗어나,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자유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것.

그것이 저 무거운 짐을 지고서라도 섬을 찾는 이유가 아닐까?

 

어느새 선착장에 이르러 굴업도를 나가는 배를 기다린다.

 

가고 싶은 섬

굴업도.

돌아오는 배위 뱃전에 기대어 지나온 뱃길 위로 부서지는 물살을 보며, 또 어디선가 누군가의 굴업도가 되고 있을 미지의 섬을 기억 위로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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