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녀온 길

지리산 둘레길 14구간(원부춘~가탄)

나무 향기 2020. 5. 5.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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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제대로된 점심 식사는 어쩌면 사치인지도 모른다.

 

5시간에 걸친 13구간길을 이어서 중간중간 적당히

가져온 행동식으로 열량을 보충하고 곧바로 걸음을 재촉한다.

 

애초에 원부춘에서 식당이나 매점 등에서 간단한 식사를

계획했지만, 마을 어디에도 그럴만한 상점은 없었다.

그나마 배낭 속에 들어있는 비상용 간식이 점심 식사가 되어버렸다.

 

 

부춘마을 회관에서 이어지는 가파른 오르막길.

이번엔 딱딱한 아스팔트 임도길이다. 

 

원부춘-가탄

원부춘 - 가탄 11.4km 약 6시간 원부춘 - 가탄 : 상 가탄 - 원부춘 : 상 구간별 경유지 원부춘 - 형제봉임도삼거리(4.1km) - 중촌마을(2.5km) - 정금차밭(1.2km) - 대비마을(1.5km) - 백혜마을(1km) - 가탄마을(1.1km)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부춘리 원부춘마을과 탑리 가탄마을을 잇는 11.4km의 지리산둘레길.지리산 고산지역의 길들을 걷는

jirisantrail.kr

대축에서 윗재를 넘어오는 길에 적잖은 체력을 소진한 터였다.

더군다나 제대로된 식사도 없이 11.4km에 이르는 난이도 상

코스를 가야한다.

서둘러 가지 않으면 산중 어둠이 닿기 전에 마무리하기가 여의치

않아 보인다.

 

약 2시간에 걸친 임도길 구간은 턱밑까지 숨을 차올리게 하고,

좁은 임도길을 지나 한 순간 광장 처럼 다져진 넓은 고갯마루가

펼져지는데 여기서 둘레길 안내판을 잘 살펴 숲길로 들어서야 한다.

이 지점이 형제봉 임도 삼거리이다.

 

둘레길 14번째 구간은 워낙 힘이 들고 울창한 숲과 급경사길이

이어지며 중간에 마땅히 쉬어갈 쉼터나 휴게 공간도 없기에

일반 둘레꾼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구간이다.

그러다 보니 길이 풀더미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곳도 있으며

특히 비가 온 다음에는 진창길도 형성이 되기도 하는 말 그대로

난이도 최상급의 코스이다.

 

코스도 힘이 들거니와 산짐승들의 출현 위험 지역도 있으므로

여러가지 위험에 준비를 꼼꼼히 해서 나서야하는 구간이다.

 

이틀 연속되는 최상급 난이도의 구간을 헤쳐오면서 지친 몸과

긴장된 마음으로 4시간여.

가탄까지의 일정을 제대로 마무리할 수 있을까?

미리 준비해간 코스별 정보에 의하면, 조금만 더 가면 중촌 마을이다.

숙박도 가능하기에 중촌마을에서 마무리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

일단, 힘내어 걸어가자.

길도 알아볼 수 없는 숲을 헤치고 처음 보는 둘레길 동무. 그 힘들었음을 아는지 작은 꼬마 화살표까지 나와서 반겨준다.

 

둘레길에서 처음 보는 크고 작은 형제 안내판을 따라 얼마 가지 않아서

오아시스와 같은 산속의 쉼터를 만났으니, "하늘호수 차밭" 이다.

들어서는 내 모습을 보자마자 두말 없이 시원한 물동이를 가져다 족탕부터 권한다. 시원한 냉커피를 한 잔 곁들이니 천국이 따로 없다.

 

깊은 산중이지만 같이 지내는 시구들이 많다. 주인 아주머니와 강아지 식구들.

시원한 족욕으로 한동안 넋놓고 숨을 돌리니 그제야 정신이 좀 드나보다.

갑자기 허기가 밀려 오고 모자란 갈증도 마저 풀 겸 막걸리 한 사발에

도토리 묵으로 한 숨을 챙긴다.

시원한 족탕 후에 막걸리와 도토리묵. 그러고 보니 새벽 아침밥 이후에 처음 먹는 제대로된 음식이다.

짐승처럼 숲길을 헤쳐 오던 기억은 어느새 뒤로 사라지고 막걸리 한 사발에

이제는 신선이 되어 본다.

지붕끝에는 히말라야에서 가져온 기도문이 깃발처럼 하늘을 수놓고

기둥에는 초록으로 물든 담쟁이 잎이 시원한 산중의 여름을 식혀주고 있었다.

이렇게 앉아서 홀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신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저 멀리 보이는 능선이 노고단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지리산 능선 자락임에는 틀림이 없겠지. 오후의 구름이 너무 아름답다.

 

산너머 이미 해는 지고, 막걸리 한 잔에 몸은 신선이 되었다.

 

가탄까지는 남은 길이 만만치 않은데, 찻집 사장님이 바로 아래에서 숙박을

같이 겸해서 하신다는 얘기에, 가탄까지 가지 않고 사장님네 숙소에서 묵어 가기로 한다.

조금 더 기다렸다가 찻집 정리하는 시각에 사장님 내외와 함께 아래 숙소로 내려와

저녁 식사겸 이런저런 얘기를 시간 가는줄 모르고 쏟아내다 밤늦은 시각에 잠을 청한다.

사장님이 직접 지은 통나무집. 매우 아늑하고, 낭만적이다. 잊을 수 없는 山中一夜 였다.

 

산중에서 너무 깊은 꿀잠을 잤었을까?

몸이 새털처럼 가볍다.

역시 사장님 내외가 차려주는 정갈한 아침식사를 마친 후에 어제 못다한

가탄까지의 나머지 일정을 마무리하러 나선다.

 

중촌에서 가탄까지는 하동 녹차밭 단지를 지나게 되는데 여기저기 펜션도

많은 걸로 보아, 녹차밭을 매개로 관광객들의 발길이 제법 많은 것으로 짐작된다.

중촌마을 어느 펜션의 담장에 핀 능소화. 능소화를 이런 산중에서 보게될 줄이야.

 

저 멀리 노고단과 주 능선이 보인다. 아버지 같은 지리산 자락의 품이다.
아침 계곡에 펼쳐진 녹차밭의 곡선이 깎아 놓은 예술품 처럼 조화롭다.

 

산 비탈에도 녹차밭이다. 이른 아침 온 마을이 녹차 덖는 냄새로 차 한 주전자를 통으로 마신듯하다.

 

정금리 녹차 마을에서 가탄마을 종착점까지는 길이 그리 멀지도

험하지도 않다.

녹차 향에 경치에 취해 놀며 쉬며 유람하듯 걷다보니 어느새 화개천 앞

가탄마을이다.

길가슈퍼 둘레꾼들 사이에는 어느새 유명한 포인트가 되어있다.

 

애초 계획했던 오미까지의 나머지 일정은 체력적으로 무리가 분명하다.

힐링의 시간이 되어야할 둘레길 걸음 걸음이 지옥훈련처럼 느껴져서는

안되기에 금번 일정은 여기 가탄 마을 길가 슈퍼에서 마무리를 지어야겠다.

 

좋은 것은 좋은 데로 언제나 남아 있길 바라는 마음.

둘레길을 걷는 이유는 항상 그러하기에 아쉬움을 남기고 집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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