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녀온 길

봉정암 사리탑에서..

나무 향기 2022. 11. 3.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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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해 전부터 가을이면 제일 먼저 백담사에서 봉정암까지의 수렴동 계곡을 따라 펼쳐진 긴 단풍길을 걷는 산행 코스를 계획했었지만, 어쩐 일인지 매번 뜻하지 않게 무산되기가 일쑤였다.

코로나, 날씨, 갑작스런 스케줄 등등...세번에 걸친 좌절 끝에 올해엔 무슨 일이 있어도 가리라 마음 먹고 벌써 여러달 전부터 준비에 들었다.

새벽 6시에 출발하는 백담행 첫 버스를 타려면 버스 터미널 근처에서 1박을 미리 하고 새벽 일찍 짐을 챙겨 나서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 버스 터미널 인근의 캠핑장의 방갈로를 예약한다. 

 

10월의 마지막 주말, 토요일 미리 가서 숙박을 하고 다음 날 새벽 일찍 짐을 챙겨 버스 터미널로 향한다.

강원도의 가을 새벽은 제법 쌀쌀한 날씨였고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시각. 그럼에도 백담사행 첫 버스를 기다리는 산행객들의 줄은 벌써 길게 늘어져 있다.

당일 일정으로 봉정암을 계획한다면 첫 차를 무조건 타는 것이 좋다. 버스의 좌측으로 앉으면 백담계곡의 멋진 계곡을 감상할 수 있다.

 

심하게 굽은 어두운 산길을 뱀처럼 구불구불 돌아 20여분을 오르니 백담사 입구 주차장에 다다른다.

주변은 캄캄하여 앞이 보이질 않아 헤드랜턴을 착용하고 차가운 새벽 숲길로 들어 서는데, 버스에서 내린 대부분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일행을 이루어 같은 방향으로 각자 걸음을 시작한다.

바람 소리 마저 고요한 새벽 산 공기를 마시며 참선하듯 마냥 길을 걷다 보니 길은 어느새 숲을 나와 계곡으로 이어지고, 어두운 침묵만이 가득하던 시야에 붉은 나뭇가지 너머로 동이 터오니 이것이 백담계곡인가 싶다.

 

깨끗한 설악의 정기에 간밤에 내린 빗물이 더해진 계곡은 형언할 수 없는 청량감을 내뿜으며 심신을 정화시킨다.

 

나이가 지긋한 산객 한 분이 소탈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계곡 뒷편에는 아직 아침 안개가 걷히지 않고 숲자락에 머물러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하고...

 

청량하고 신비스런 숲의 기운에 취해 아래를 보니 발밑에는 어느새 푸르게 물든 하늘이 펼쳐져 있다.

하늘이 맑으니 그 하늘을 품은 물속도 더없이 맑다.

 

차가운 가을비가 내린 설악에는 붉게 물들었던 단풍은 간데 없고 길가에 수북히 쌓인 낙엽만이 지나간 절정기를 아쉬워 하며 10월 마지막 숲길을 장식하고 있었다.

 

산행 초입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나뭇잎은 가지끝이 아닌 차가운 흙바닥에서 바람에 휩쓸려 뒹굴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랴. 떨어진 가을도 가을인 것을.

 

가을비 촉촉히 젖은 숲길은 오래된 설악의 세월 만큼이나 그 색도 짙어져 검은 색을 띠고, 동화속 마법의 검은 벽돌길 처럼 숲으로 나를 인도하고 있었다.

 

백담계곡은 전체가 하나의 절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봉정암까지 가는 계곡 길 곳곳에 간절한 세속의 기원을 담은 크고 작은 돌탑들이 세워져 있는데, 그 간절함들이 이 길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나와서 부디 서방정토에 다다를 수 있길 조용히 기원해 본다.

 

백담사를 출발한 지 거의 한 시간이 지나니 영시암이다.

영시암까지의 길은 큰 어려움 없이 쉽게 다다를 수 있는 평탄한 길이다.

번잡함을 떠나 조용히 명상하며 산책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길이리라.

 

영시암에서 한 숨 돌리고 가려하니, 오가는 많은 불자들과 산객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따뜻한 물과 봉지 커피가 정성스레 준비되어 있다.

요즘처럼 쌀쌀한 가을날에 이보다 더 좋은 위안이 있겠는가?

남을 배려하고 공덕을 쌓는 일이 반드시 크고 창대한 것만이 아니다.

꼭 필요한 곳에 작은 마음씨 하나 더하는 것이 가장 큰 공덕인 것을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다.

 

나는 커피 대신 그저 따뜻하게 데워진 물 한 컵으로 새벽 공기에 젖은 속을 달래어 본다.

뒤를 돌아 보니 빗겨 내리는 아침 햇살이 부처님의 온화한 미소처럼 서서히 차가운 새벽 숲을 데우며 내려서고, 검붉게 보이던 가을 나뭇잎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황금색과 선홍빛으로 새단장을 한다.

아쉬운 산객을 위해 선보이는 설악의 마지막 오색단풍인가?

 

영시암을 지나서부터는 급하게 경사진 길이 계속 이어지기에 걷기에 다소 힘들어진다.

 

길이 험해지는 만큼 주변의 풍광은 오히려 믿기지 않을 비경으로 서서히 모습이 바뀐다.

 

안개 속에 부서지는 빛줄기로 인한 눈부심이 숲을 휘감아, 마치 동양화 속을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을 자아낸다.

 

영시암에서의 따뜻한 물 한 컵이 대단한 위안이 되었는지, 수렴동 대피소를 머무르지 않고 그냥 지나쳐 간다.

 

봉정암에는 철야 기도를 하는 적지 않은 불자들이 거의 매일 오르내리는데, 저 분도 그러한듯 어제는 얘기치 못한 일로 올라오지 못하고 지금에서야 올라간다는 말과 함께 한 무리의 하산중인 어르신들과 인사를 주고 받으며 혼자 발걸음을 재촉한다.

축원하고 기원하고...이 세상, 아니 우주 천지의 모든 어둡고 힘들고 지친 삶들에 평안과 위안이 깃들기 바라는 마음이야 어디 한 구석 다름이 있으랴.

 

절벽 아래로 계곡과 나란히 길을 같이하고 있는 철길도 색다른 시간을 선물해 준다.

 

눈부시게 밝아 오는 설악의 아침은 기암 절벽 위에 화려한 오색실로 수를 놓은 것처럼 수려하다.

 

크고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대청봉 기준으로 절반을 왔다.

 

봉정암까지의 수렴동 계곡은 오르는 내내 용아장성을 보며 걷게 되는데 용아장성의 깎아 지른 조각 같은 위세와 산세를 보노라면 절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봉정암까지의 길에는 용아장성의 거친 산세를 타고 흐르는 세개의 폭포를 만나게 되는데, 간밤에 내린 비로 인해 폭포를 흘러 내리는 물이 마치 용들이 승천하듯 그 움직임이 거칠고 힘이 넘쳐, 보는 내내 가슴 속에 쌓인 세속의 먼지가 시원하게 씻겨져 내리는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세 폭포 중에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용소폭포.

 

용소폭포

 

용소폭포를 지나 가파른 계단길을 오르게 되면 또한 그림같은 풍경을 볼 수가 있다.

앞만 보고 그냥 가서는 안되는 길이다. 쉬엄쉬엄 기도하듯 천천히, 지나온 길 뒤돌아 보면서 가야하는 그런 길이다.

 

계곡이 깊어지고 산이 높아질수록 주변은 용아장성의 기암 절벽으로 병풍을 이루는데, 그 위세가 금방이라도 장검을 휘두르며 뛰어나올 것 같은 갑옷 입은 장군에 버금간다.

 

용소폭포를 뒤로하고 얼마 되지 않아 두번째로 관음폭포를 만나게 되는데 그 길이와 웅장함이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관음폭포

 

이어서 마지막으로 만나게 되는 쌍용폭포이다.

세 폭포가 중간에 짧게 끊어지거나 줄기가 약해지긴 해도 사실 크게 보면 쌍용폭포와 계속 이어진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특히 관음폭포와는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기에 계속 이어지는 모습이 그 두 폭포를 함께 본다면 족히 수백 미터는 되는 엄청난 길이다.

쌍용폭포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많이도 걸었다.

 

길을 걷다 산 속 옹달샘 하나를 만난다.

지혜샘이라는 안내판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저 샘물을 마시면 지혜로와 지는가?

그러지 않아도 지혜가 과하게 넘치는 세상이 아닌가?

 

이제 난이도만 놓고 보면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최대의 난코스. 봉정골 입구.

거의 60도 가까운 경사면을 300m 가량 계속 치고 올라가야 하는 깔딱 고갯길이다.

 

거리는 짧지만 결코 짧지 않은 너덜길 구간이다.

산행 초입도 아니고 4시간 남짓의 산행 후 막바지에 나타나는 급경사 구간은 정말이지 반갑지 않다.

 

거의 다 오른 후 잠시 휴식겸 발아래 펼쳐진 가을 설악을 감상하며 허벅지의 긴장을 풀어본다.

하늘이 이렇게 맑았었나...

 

깔딱고개를 지나 200m 전방에 험난한 봉우리를 배경으로 봉정암이 보인다.

동기와 불사를 하고 있는지 황금빛 청동 기와가 번쩍이며 자리를 잡고 있다.

깊은 산중에 황금빛 동기와 불사라....

 

봉정암은 이제 산중 암자가 아니라 왠만한 산문의 절보다 더 큰 규모가 되어있는 듯 하다.

 

봉정암에 도착한 시각이 11시. 봉정암의 공양 시간과 우연히 맞아서 예기치 않게도 절 공양을 하게 되었다.

쌀쌀한 날씨에 따뜻한 미역국에 더운 밥 한 술 말아 먹으니 부처님 은덕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귀한 공양을 했으니 밥알 한 톨도 남길 수 없는 일이다.

 

자비로운 공양 뒤에 오늘 산행의 종착지인 사리탑으로 오른다.

사리탑은 봉정암에서 5분 남짓 거리에 있기에 호젓한 오솔길을 따라 산책하듯 오르면 좋은 길이다.

 

사리탑 앞에서 지성으로 기도 드리는 불자님들을 뒤로한 채 이어지는 언덕 위 전망대로 올라서니 오른쪽으로는 공룡능선과 왼쪽으로는 용아장성이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한꺼번에 그 엄청난 자태를 느러낸다.

여기가 인계인가? 선계인가?

공룡능선과 용아장성의 넘치는 기운과 웅장함을 이렇게 손에 잡을듯이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 또 있을까?

용아장성과 공룡능선의 파노라마 샷. 왼쪽이 용아장성, 오른쪽이 공룡능선이다.

 

용아장성

공룡능선과는 달리 아직은 일반 등산객에게 접근이 허용되지 않는 험하고 또 험한 용아장성을 바로 눈앞에 둔 현실이 믿기지 않는다.

하늘은 푸르고 눈처럼 흰 구름이 위로 떠올라 그림처럼 자아내는 모습이란, 말로써는 표현할 길이 없다.

 

공룡능선

왠만한 산꾼이라면 한 번씩은 꼭 다녀오는 필수 코스인 공룡능선이지만, 직접 두 발로 걷는 것과 멀리서 전체적인 모습을 이렇게 조망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이다.

 

어루만지듯 구름이 넘나드는 설악 준령의 그 모습에 반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넋을 잃은 채로 마냥 서있기만 한 게 얼마 동안인지...

정신을 차리고 인증샷을 남긴다.

 

 

인간 세상을 잠시 떠나 있다 돌아 온 것 처럼, 이제 하산을 위해 뒤돌아 서니 다시 간절함이 메아리치고 있는 속세이다.

각자의 마음 속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애틋함이 그 무게를 못이겨 무너지지 않도록, 작은 바람 하나 보태며 사리탑 주위를 잠시 서성이다, 왔던 길로 방향을 잡아 하산길을 내딛는다.

 

새벽 안개에 가려 보지 못했던 설악의 늦가을이 파란 하늘과 함께 작별 인사를 건넨다.

울지 말라고, 아파하지 말라고...

저 하늘이 저렇게 푸르고 깨끗했던가?

 

사람들의 발자욱 위로 오색단풍이 푸른 가을 하늘과 어우러진 하산길의 영시암.

유난히 포근하고 따스했던 그 느낌은 한동안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영시암의 포근한 작별 인사를 길동무 삼아, 그렇게 간절했던 백담사~봉정암 산행을 마무리 한다.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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